이후 인근 공원에서 정두언 전 의원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정두언 사망 자살 이유 등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진 바 없다고 하는데요. 이번 소식 으로 정두언 의원 프로필에 대한 관심 도 상당합니다.
정두언은 전 방송인 겸 자영업자이자 정치 인 이었습니다. 대한 민국의 제 17대~19대 국회 의원 이었으며, 지역구는 서울 서대문구 을 지역이었습니다. 정두언은 20대 총선에서 낙선 한 뒤에 정계 를 사실상 떠났으며, 그 뒤로는 여러 시사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시사 평론가의 길을 걷고 있었 는데요.
정두언 의원 고향 서울 태생 으로, 4남 1녀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정두언 할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에 군수를 지냈 으나 집안이 몰락하면서 정두언 아버지는 광주에서 서울로 올라와 정성태 전 국회부의장의 운전기사로 일했 다고 하며, 정두언 어머니는 모래내시장 에서 좌판을 펴 5남매를 교육시켰다고 하죠.
당시 노태우 정무제2 장관을 보좌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20여년 간 문화 체육부, 국무총리 행정조정실, 국무총리 비서실 등을 거쳐 노태우를 따라 올림픽 개최 지원 업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쓴소리꾼" 정두언
그러다 정치로 뛰어들기로 한 2000년 서울 서대 문구에 출마했으나 장재식 후보에게 2000표 차이로 떨어져 우울증 치료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국회의원 이명박의 도움 으로 거의 서울시장의 출마를 혼자서 준비한 것으로 유명했으며 민선 3기 이명박 서울특별시장 당선으로 서울시 정무 부시장이 되어싿. 당시 서울특별시 프로축구단 추진위원장에 위촉되기도 했다.
정두언의 정치사는 그야말로 '파란만장'
그리고는 2007년 12월 이명박 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17대 대통령 당선자 보좌역을 맡았고, 2008년 18대 총선에 재선하기도 했다. 특히나 2001년 출판 된 저서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에서는 비효율적인 현재 행정 행태를 비평했으며, 2011년에는 <한국의 보수, 비탈 에 서다>라는 저서를 내기도 했다. 앞서 설명한 가수로서도 4집이나 앨범을 내기도 한 이색적인 이력이 있다.
정두언 전 의원은 이날 자택에 유서 를 써놓고 나간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정두언 전 의원의 부인이 유서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정두언 사망 가능성을 두고 경찰 과 소방은 드론과 구조견 등을 투입해 수색에 나섰지만, 오후 4시 25분 끝내 정 씨는 정두언 사망이 발견 됐습니다.
정두언 유서내용을 궁금해하는 누리꾼 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정두언 유서내용은 많은 분들의 관심사인데요.
신고 시각 기준 으로 오늘(16일) 오후 3시 58분쯤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실락공원 주변 에서 정두언 전 새누리당 국회의원이 사망으로 발견 됐습니다. 정두언 유서는 과연 어떤 내용일까요?
정두언 전 국회의원은 1957년 서울 에서 태어나 서울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습니다. 정두언 재혼부인으로 이화익인지, 정두언 전부인인지는 확실치 가 않네요. 아무튼 정두언에게 아들 한명과 딸 한명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정두언은 대한 민국의 전 방송인 겸 자영업자였으며 공무원 겸 정치인, 아마추어 가수였습니다. 정두언은 대한민국의 제17대~19대 국회 의원이었으며 지역구는 서울 서대문구 을 지역이었다. 정두언은 나름대로 다사다난한 인생을 보냈으며, 이로 인해 정치계 의 풍운아로 종종 불리기도 했다. 20대 총선에서 낙선한 뒤 정계를 사실상 떠났고 그 뒤로는 여러 시사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 하며 시사 평론가 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정태근 전 의원과 여러모로 행적이 비슷해서 인지 '정브라더스'라고 묶어서 불리기도 합니다. 2017년에는 정봉주 전 의원이 진행 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정봉주의 정치쇼 '에 <정두언, 정태근의 보수의 품격>이란 코너로 같이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정성태 전 국회 부의장은 그의 먼 당숙뻘이었는데, 그의 아버지를 각별히 아꼈고 일자리를 준 것이었다. 어쨌든 그 덕분에 정두언은 서울창서초등학교와 배문중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정두언은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편이어서, 우울한 소년 시절을 보냈다. 정두언은 "아버지는 늘 밖으로 도셨고 수시로 어머니를 구타했습니다. 정두언 은 나는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 으로 내 자신을 망가뜨리는 것이 너무 두렵고 싫어서 자기애 또는 자존심을 드러냈다"는 고백을 하기도 했습니다.
정두언은 배문 중학교 때부터 그는 팝송을 많이 불렀는데, 화장실에서 30분에서 1시간 정도는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정두언은 노래만 잘 하는 게 아니라 공부 역시 아주 잘 해서, 1973년에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리고 정두언은 경기고를 졸업한 해인 1976년에 서울대 학교 사회계열에 합격했고 2학년 올라가면서 결정하는 전공진입에서 사회과학대학 무역학과에 진학 하였다.
정두언은 서울대 재학 시절에는 'Spirit of 1999'라는 록 밴드를 결성 하여 활동했다. 원래부터 엔터테이너 기질이 있어서 중고교 때도 오락 부장이나 소풍 등에서의 사회를 도맡아서 봤고, 이후 대학생 때나 사회생활 할 때도 술자리나 회식 또는 연수회를 가면 언제나 사회를 맡았고 분위기 를 주도하는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정두언은 그 와중에도 고시 공부 를 열심히 하여 서울대학교 무역학과(국제경제학과) 재학 중에 제24회 행정고시에 합격하였다. 그런데 정두언은 우수한 고시 합격 성적에도 불구하고 연수 실습 점수가 0점이어서 공무원 임용이 취소될 처지에 놓이기도 했다. 그와 시비가 붙은 구청 인사 담당자 가 앙심을 품고 영점 처리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재능을 알아본 다른 인사 담당자가 그를 수료 시켰다.
정두언은 그 뒤 행정고시 합격자 들에게 부여되는 특혜인 장교 복무 대신 사병으로 자원 입대하여 강원도 양구군에서 복무하고 육군병장으로 만기 전역 하였다. 정두언은 전역 후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무역학과를 졸업하고 행정 사무 관시보에 임용되었다.
정두언 의원은 한 때 최고 권력의 자리 에 있었다. 1인자는 아니였지만 2인자 의 지위에 머물며 자신의 지위를 유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주위에 정적 들은 그를 가만히 나두지 않았다.
그리고 구치소에 약 10 달간 옥살이 를 하게된다. 그러나 신은 있었다. 3선 의원 으로 화려하게 복귀한다.
하지만 4선 의원 의 문턱은 너무 나도 높았다. 낙선 뒤 찾아온 것은 우울증... 그리고 이혼...(참조로 전 부인과 슬하 에 아들과 딸이 있습니다.)
극심한 우을증으로 괴로워하던 그는 목을 맸다. 하지 만 목줄이 끊어지면서 또다시 신은 그를 살려주었다. 그리고 새 인연을 만났다. 2018년 정두언 의원은 재혼을 한다.